옥희의 ‘인생 열차’를 신나게 즐겨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케이아이 작성일22-01-19 14:34 조회146,036회 댓글0건관련링크
- https://youtu.be/SiaQ1ihRzCM 100136회 연결
- https://youtu.be/aitz8SRtOzU 101288회 연결
본문
옥희의 ‘인생 열차’를 신나게 즐겨요
시원하고 화끈한 가창력 마음껏 과시
고음에 힘이 넘치는 창법은 여전하다. 지난 1970년대 최고의 스타로 인기를 누리던 여가수 옥희가 신곡 ‘인생 열차’(박정란 작사/박용진 작곡)로 가요팬들의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무대에서 잠시도 쉴 새 없이 율동을 곁들여 속사포처럼 불러야 하는 빠른 템포의 곡인데도 조금도 숨차거나 지친 기색이 없다. 옅은 허스키 보이스에 시원시원하고 화끈한 가창력도 여전하다.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는 게 인생이니 앞만 보고 활기차게 살아가자는 내용의 노랫말에 군가처럼 씩씩한 곡이어서 막힌 속이 금세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시원스런 가창력에 따라 부르다 보면 인생에 절로 활력이 넘칠 것 같은 기분까지 생긴다.
발표하기 무섭게 송광호, 박미현, 임성환 등 유명 노래교실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할 무렵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강타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전국의 모든 노래교실이 문을 닫는 바람에 막 뜰 것 같은 분위기가 삭아들어 속이 많이 상했다.
그래도 TV의 건강 프로그램에 자주 나가다보니 자신을 좋아하는 20대 젊은 시청자들까지 새로 생겨 신바람을 내며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생 열차’를 발표할 때 함께 노래한 발라드 ‘노을’도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웃사촌’ 히트하며 스타덤에 올라
옥희는 마리오 란자의 노래를 잘 부르는 테너 가수로 ‘코리아 란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아버지와 예쁜 목소리에 남다른 노래솜씨를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실력이 출중해 15세 때 명동에서 샤넬의상실을 운영하던 고모 샤넬킴의 소개로 작곡가 이봉조 선생에게 오디션을 받고 이듬해 여성 밴드 서울 시스터즈의 리드보컬리스트로 발탁돼 홍콩의 밤무대에서 데뷔했다. 당시 사용하던 예명은 키티 킴.
이후 이란 이라크 그리스 캐나다를 거쳐 미국 라스베가스 무대에 진출했다. 라스베가스에서는 밴드의 싱어 겸 사회자로 인도네시아 합창단과 함께 무대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밴드가 해체되어 귀국한 것은 21세 때인 1973년. 이듬해 발라드 ‘나는 몰라요’(김중순 작사/김희갑 작곡)를 발표하며 데뷔해 출중한 가창력으로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최고의 신인 여가수로 떠오른 옥희는 1975년 발라드 ‘두 손을 잡아요’, 고음이 매력적인 애절한 창법의 ‘눈으로만 말해요’, 모타운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훵키 리듬의 ‘어쩌면 좋아’ 등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담은 2집을 내놓으며 남다른 가창력을 마음껏 과시했다.
최고의 히트곡 ‘이웃사촌’(엄진 작사/작곡)을 발표한 것은 1976년. 이후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 홍수환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화제를 뿌렸다. 두 스타는 17년 만인 2008년 재결합을 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